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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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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작업은 묻어두었던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할 듯 합니다.

차가운 손을 가진 이방인의 이야기 The Story about an Alien with Cold Hands
#0.
그 여자가 대체 어디에서 이 도시로 들어오게 된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떠나는 이 익명의 도시에서, 그 여자의 행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터무니 없는 일이다. 그 여자는 -나 또한 그렇듯이- 이 도시를 잠시 거쳐가는 수많은 이방인들 중의 하나일 것이 분명할 터였다.
#1.
내가 이 도시로 들어온 것은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하루하루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을 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힘들었을 때, 차라리 누군가에게 내 영혼을 팔아 치우고 싶을 지경이었을 그 때, 나는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것을 처분하고 달랑 여행가방 하나를 채워 길을 나섰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잘 떠오르지 않았고, 생각만큼 유연한 '유목'을 할 수 있지도 않았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삶을 얻었지만, 나는 언제나, 떠날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더 머무를 것을 생각하곤 했다. 머무를 장소가 정해지면,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들, 조금 더 편리한 생활을 위한 살림살이들이 필요했다. 결핍의 느낌이란 순식간에 불안을 부르고, 피해의식을 불러오기도 한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보다 안전하고 보다 안락한 생활이란 어쩌면 다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는데, 그건 사실 전혀 손에 닿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 낯선 도시 위에서 겁에 질린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어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누군가 함께 있어줄 사람마저 필요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기대하고, 쉽게 쉽게 겁에 질리고, 공허한 기분이 되어버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버젓이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의 몸만큼이나 모든 경우를 적응해 나가고, 오히려 그 상황에 맞추어 변해가기까지 하는 것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토록, 단 한 순간마저 참아내기 힘들만큼 괴로워했던 내 몸은 이렇게 줄기차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어내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가진 물건들은 하나 둘 없어져 버리거나 제 명을 끊어갔다. 작은 귀걸이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머지않아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어느 샌가 두 쪽으로 쪼개어져 버렸고, 어느 날은 멀쩡하던 신발이 찢어지더니, 또 어느 날은 순식간에 목걸이가 끊어지면서 구슬들이 온통 바닥에 흩어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들을 힘들게 주워 모아 몇 시간이나 공들여 꿰어보았지만, 목걸이는 본래 길이의 반도 되지 않았다. 가방의 끈이 끊어지거나, 머리카락을 묶은 고무줄이 끊어져버리는가 하면, 얼마 되지 않는 옷 중의 하나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문을 잠그려고 열쇠를 꺼냈을 땐 열쇠고리의 장식에 금이 가 있기도 했다. 밥을 먹으려는데 젓가락이 부러지고, 그릇의 이가 나가는 일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내 몸은 이 도시의 모든 낯섦에, 적어도 내 몸에 지닌 물건들보다는 좀더 무디게 반응하면서 잠시도 숨쉬기를 멈추지 않았다.
#2.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이 도시로 들어와 잠시 머무르던 한 지저분한 모텔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꽤 긴 시간 동안이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지루해 하던 몇몇의 사람들 틈에 여자도 끼어있었는데,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그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신경질적으로 자기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새빨간 색의 여행용 가방에 한쪽 팔꿈치를 걸치는 것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그 여자는 어딘가로 떠나는 중이거나, 혹은 어디에선가 떠나온 것임에 분명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던 몇몇의 사람들 중에서 유독 그 여자를 관심 있게 살피기 시작한 것은 여자의 손이 언뜻 푸른색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있다고는 했지만,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이 도시의 날씨란 지독하게 변덕스러워서, 따뜻해지는가 하면 이내 매서운 돌풍이 불기도 했으니, 종종 사람들은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날도 갑작스레 불어 닥친 바람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지만, 저렇게나 파래지는 손이라니. 여자의 손가락은 지나치게 가늘었고, 지나치게 푸른 기를 띄고 있었다. 나는 한번도 사람의 손이 그렇게 파래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내가 계속해서 그 여자를 관찰하고 있는 사이에도, 여자는 연신 자신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여자의 그런 노력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 가냘픈 양손의 푸른 기는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곧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왔고, 다행이 여자가 그 버스에 올라탔기에 나는 일부러 여자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안에서도 여자의 신경질적인 손놀림은 그치지 않았고 푸른 기 역시 그대로였다. 나는 어떻게든 그 여자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갑자기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이 무척 우스운 짓처럼 느껴져 창 밖으로 눈을 돌려 신경을 다른 곳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머잖아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곳에 정차했고, 버스가 그곳을 떠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버스 안 여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3.
낯선 사람에게 관심 갖는 일 따위는 적어도 나에게는 치가 떨리도록 혐오하는 것들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상하리만큼 다른 이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가끔은 관심을 넘어서 지나칠 정도의 참견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진심으로 살의를 느껴왔던가. 그럼에도 나는 간절히 이 여자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욕망. 그것은 분명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감정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더욱 스스로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것이 나에게 있어 용인되거나, 그럴 수 없는 것이며, 나는 또한 얼마만큼 단호하게 내 안의 감정들에 대해 정의 내리고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동원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 이상한 감정을 떨어내려 애를 써 보았지만, 이 여자와 말해야만 한다는 제어할 수 없는 욕구는 이미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을 지워내고 있는 중이었다.
#4.
여자는 손을 주무르는 것을 포기하고는 고개를 창 쪽으로 살짝 돌리며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자의 얼굴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여자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바짝 쓸어 넘겼다. 여전히 창백한 푸른빛의 손. 버스 안은 무척 따뜻해서 창문은 온통 부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옷깃을 꽁꽁 여미던 사람들은 겉옷을 하나 둘 씩 벗어 들었지만 그 여자는 여전히 추위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쥐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 손이 분명히 차가울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여자가 다시 손을 들어 김이 잔뜩 서린 버스의 창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소리를 내면서 여자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단조로운 마찰음이 여자의 손이 울고 있는 소리일 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빠져 넋을 잃고 여자의 손놀림에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5.
여자의 손이 울고 있다는 건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손으로 우는 사람을 본적은 없었지만 이 여자의 손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서럽게 우는, 그런 여자들의 뒷모습을 연상시켰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나에게는 그 연상작용을 설명할 재간이란 없다. 그렇지만 저렇게나 푸른 손을 가진 사람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6.
아까부터 날 보고 있었죠? 여자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너무나 놀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여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의 나의 행동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떠올리고, 다시 수정하고, 떠올리고, 지워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나 둔감할 수가. 몇 번이고, 입을 떼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떤 재치 있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도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나에게 관심을 갖는지 알 것 같아요. 그렇게 미안한 표정은 할 필요 없어요. 나에게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까.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정신 없이 맥박이 뛰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여자에게 말했다. 손이, 손이 무척 시렵지 않나요. 여자의 얼굴에 짧은 순간 미소가 지나갔고, 나는 나의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주변을 탓하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래요, 무척. 누구든 그걸 알아차릴 수 있겠죠, 이렇게 파랗게 질린 손이라니.
#7.
어디서 내리나요? 짐, 이 무거워 보이는데, 도와, 드려, 도, 될, 까요. 나는 어렵게 말을 이었고 여자가 대답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나에겐 마땅히 가야 할 목적지가 없는 걸요. 찾아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말예요. 실은 어디서 내려야 할까를 생각 중 이였어요. 버스에 탄 이후부터 줄곧. 이 짐을 끌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까마득해서 몇 번이나 내리는걸 포기하기도 했지만요. 여자의 푸른 손이 빨간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우습지 않나요, 이런 변변찮은 몸뚱아리 하나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끌어야 한다는 것이. 나는 아직 버려야 할 것들, 잃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텐데, 이상하게도 짐은 차츰차츰 늘어만 가요.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여행을 지속하기엔 이 가방은 너무 무거운데. 여자의 손은 가방 언저리에서 천천히 미동하고, 나는 그 기묘한 색깔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목적지 없이 계속되는 여행이란 나에게도 지워진 숙제였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무엇을 찾아야 할지 조차 모르고 있다.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내가 자못 어리둥절한 표정을 그녀에게 지어 보이자 여자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는 거죠? 뭐가 그리 궁금한 건가요? 그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니, 사람들은 모두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게 분명해요. 나는 단 한번도 소통이란 단어를 내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과도 역시 소통할 수 없을 테죠. 그건 마치 내가 아무와도 손을 잡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걸 거예요. 아무도 나와 손잡으려 하지 않아요. 손, 이 손을 잡는다 해도,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죠. 당연해요. 그토록 차가운 느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굉장히,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이겠죠. 여자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의 풍경에 눈을 멈추고 다시 두 손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8.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예요. 꽤 긴 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에야 나는 다시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고,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어요. 나는. 나는 당신의 손이 울고 있는 걸 봤어요.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손은 울고 있어요. 분명히. 나는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여자는 아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창 밖을 넘어다보는 여자의 눈꺼풀이 가끔씩 깜빡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자의 움직임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여자가 나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마도 내가 대 여섯쯤 된 어린 여자애였을 때, 그때 나는 어른들은 울지 못한다고 믿었어요. 나는 너무나 어른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눈물을 참곤 했었죠. 결코 울지 않게 되는 날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을 까요. 아이들은 매일매일 쉬지 않고 자라고 있는 데 말예요. 아무튼, 나는 그런 식으로 어른 흉내를 내면서, 언젠가 정말 어른이 될 날만을 기다렸어요. 어느 날 꽤 곤한 낮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졌어요.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두리번거렸죠. 내 발치쯤엔 엄마가 앉아있었는데, 아래쪽으로 떨군 고개 때문에 목뼈가 징그럽게 두드러져 보였고, 엄마의 어깨와 등이 조금씩,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죠. 목에서부터 등으로 흘러내리는 뼈의 모양이 금방이라도 일그러질 듯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데도, 나는 어른은 울지 않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요하지만 치열한 움직임을 우는 행위와 쉽게 연결시킬 수 없었어요. 엄마는 곧 무릎께에 모으고 있던 손을 들어 눈가를 재빠르게 훔쳐낸 후 내 쪽으로 돌아앉았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는 척 눈을 감아 버렸죠. 덮고 있던 이불 밖으로 나와있던 내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고 엄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문이 끝까지 닫히는걸 확인하고 나는 손을 다시 빼내어 눈앞으로 가져왔죠. 엄마의 손은 분명히 축축한 느낌이었고, 엄마의 손이 닿았던 내 손까지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말았던 거예요. 그건 정말이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사건 이였어요. 나는 아직도 몸을 들썩이며 울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뒷모습을 잊지 못해요. 어린 시절의 그걸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의, 어른이 되어버린 여자의 눈물이 뭘 의미하는 지 알 것 같아요. 나는 예의 그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힘들게 말을 끝냈고, 여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버스는 이제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9.
울고 있는 손이라니.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길 바랬지만, 여자는 여전히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운 손을 갖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누구와도 대화하기 힘들어 질 때쯤 나는 이미 누구와도 손잡을 수 없었으니까. 아, 누구도 나와 손잡으려 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죠. 나는 점점 모든 관심의 밖으로 밀려났고, 모든 것으로부터 낯설어졌어요. 어느 순간에건, 어느 곳에서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느낌은 굉장히 미묘한 것이더군요. 아무 것도 짐이 될 것이 없는 삶인데도,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무게를 느껴 지나치게 피곤해 하고, 종종 겁에 질려 있기도 해요. 머무르면 곧 떠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도, 나는 그 잠시의 머무름을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언제나 그곳이 마지막 장소가 되기를 기대해 보지만 또 이렇게 어딘 가로 떠나고 있어요. 날마다 제어하기 힘든 모순된 마음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뒤섞여 나를 괴롭히고, 두 손은 내 힘으론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점점 더 차갑고 푸르게 변해가요. 할머니가 남긴 지도를 들고 여행을 시작했지만, 이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바로 내가 머무를 수 있는 그 어딘가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 거예요. 사실 이 지도는 길을 떠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길을 찾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도대체 나는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얼마나 많은 곳들을 거친 후에야 나의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요. 여자가 드디어 고개를 돌리고 나에게 물었다. 그곳엔, 혹, 나의 손을 잡아줄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대로 이 손이 울고 있는 것이라면, 그곳에서 내 손들은 눈물을 멈출 수 있는 걸까요. 내가 머뭇거리며 여자에게 무언가 건낼 말을 찾고 있을 때, 버스가 서서히 속력을 늦추다가 멈춰 섰고, 버스기사는 마지막 정류소임을 외쳤다. 우리, 이제 내릴 수밖에 없겠네요. 짐을 내리는 걸 도와 드릴게요. 나는 서둘러 일어나 여자의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아, 내가 할 수 있어요.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뒤따라 일어났고, 손을 뻗어 가방의 손잡이를 뺏어 쥐려 했다. 여자의 손이 내 손위로 겹쳐지자, 여자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여자는 걱정스런 얼굴로 거듭 사과해왔다. 손이 닿았던 시간이 너무나 짧았던 걸까, 나는 사실 여자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괜찮아요. 나는 가방을 끌고 버스의 출구 쪽으로 나와, 곧 뒤따라 나온 그녀와 함께 가방을 버스 밖으로 끌어내렸다. 꽤 덩치가 커 보였던 가방은 의외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버스가 큰 소음을 남기고 떠나버린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그 길 위에 잠시 서 있어야만 했다.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손가락 끝으로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저 나무 밑으로 가서 조금 쉬면서 어디로 갈까를 정해야겠어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내리다니. 그렇지만 여전히 추워요, 그렇죠? 어서 따뜻해 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좀더 가볍게 떠날 수 있을 텐데. 도와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여자는 가볍게 목을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섰다. 나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여자는 그 풍경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가방을 끌고 움직이는 여자의 뒷모습이 서서히 풍경과 하나가 되어갔다. 저, 잠깐만요. 나는 이 휘발하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다급히 여자를 불러 세우고는 여자를 향해 힘껏 뛰었다.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선 여자에게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나는, 말했다. 당신이 머무를 곳을 찾는 그 여행, 나와. 함께. 하. 지. 않을래요. 나는 숨을 고르며 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자가 거절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함께가 아니어도, 우리는 어차피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 지난한 여행의 끝,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어디쯤에서 다시 서로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여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놓고, 나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그 푸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기쁘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나에겐 이 푸른 손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c) 차가운 손을 가진 이방인의 이야기, 정은영, 2002
정류소에서 만나 흐르는 데로 길을 가는 이 여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소통이라는 문제입니다. 정류소, 버스, 공간, 이동, 경계, 흐름, 여자, 소통은 이 프로젝트의 키워드가 될 것 같습니다.
Posted by outsideart at July 19, 2005 09:5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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