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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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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의 핸펀 아트와 미디어의 정치학
양아치의 작업은 손에 잡히는 물건 만들기 작업이 아니라는 점에서 선명하게 차별화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그는 3백만원 프로젝트를 두 개의 프로젝트로 나눠서 실행했다. 물론 두 가지 다 같은 포맷이다. 하나는 매점없는 학교 풍문여고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삼성카드에 관한 얘기다. 핸펀 통화를 웹사이트의 컨텐츠로 활용하는 양아치식 전술미디어 구사는 미디어의 정치학에 대해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풍문여고 매점에 관한 뒷담화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무언가 군것질을 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난다.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어지는 학생시절의 군것질은 단순한 충동을 넘어 근본적인 욕망의 문제이기까지 하다. 양아치의 풍문여고 프로젝트는 매점 폐쇄 조치 이후 근본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기본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생들의 먹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교내에 구내식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는 전화통화를 중계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참가자 이지연씨는 풍문여고 2학년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매점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상대방은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사전에 전화통화를 하기로 약속한 풍문여고 재학생이다. 학생의 전언은 생생하게 학교 안의 갑갑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통화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풍문여고 매점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5-6년 전에 불량식품 문제로 폐쇄된 풍문여고 매점은 그 이후 다시 열리지 않고 있다. 학생들은 수위 아저씨와의 실랑이를 통해 교문을 돌파하거나 소극적으로는 등교 시에 먹을 것을 확보해서 등교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학생들은 학교 밖 안국동의 가게들과 담벼락을 상에 두고 거래를 벌인다. 학생들의 불편함은 교칙에 의해 벌점을 부여받는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학교 밖의 군것질 거리를 조달하도록 하고 있다. 학교 학생회는 이 점에 대해 매점 부활을 건의해왔지만 학교 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매점 복원을 지연하고 있는 학교는 학생들의 욕망을 폄하하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양아치는 그밖에도 학교 졸업생과도 통화를 시도했으며, 학교 선생님과의 통화도 있었다. 이들의 통화 내용은 통화음성의 질과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인터넷 사이트의 컨텐츠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동네 학교 매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예술가 양아치의 행위는 적잖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양아치의 예술은 동네 여고의 학생들의 작은 문제를 통해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에 다가서고 있다. 그것은 박제화된 예술의 예배적 기능을 넘어서는 포스트 모던한 미술상황을 꿰뚫는 작은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이다. 양아치의 풍문여고 매점에 관한 뒷담화는 전술미디어 잔잔한 파장 속에서 오늘날 예술가에게 있어 미디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작지만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삼성카드 프로젝트
삼성카드 프로젝트는 풍문여고 매점에 비해 훨씬 더 깨는 구석이 있다. 공식적인 계약조건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카드 이용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말하면 2만원 상당의 보너스를 제공하면서 계약을 지속할 것을 권면한다는 내용을 듣고는 실제로 계약 해지를 시도해보는 통화이다. 양아치와 협업을 하기로 한 발신자는 삼성카드에 전화를 건다. 실제로 상품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통화의 목표. 거대자본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카드사의 서비스의 실체를 파악해 보는 것이다.
피식피식 웃음을 유발하는 사소하고 유치해보이는 통화 내용이 이어진다. ‘안녕하십니까? 삼성카드입니다’로 시작해서 계속되는 번호선택 안내방송이 흐른다.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번호를 누르는 지루한 인내의 과정이 이어진 후, 드디어 통화가 되었다. 피곤한 시스템은 인내력을 테스트 하며 이용자에게 명령을 이어나간다. 시스템에 접속하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한 컨텐츠로 기능하기까지 한다. ‘반갑습니다. 삼성카드 000입니다’라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 후, 카드 계약 해지를 볼모로 한 상품권 획득을 위한 검토가 이어진다. ‘카드 해지하려고 하는데요’, ‘불편한 점이 있으셨나요?’ ‘연회비를 내고 사용하는 카드 서비스는 영화나 놀이공원 이용 할인혜택을 드립니다. 더 써보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계속 질질 끌면 이용자를 잡아보려던 노력은 돌연 취소를 최종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대목은 대본에 없던 엔지 상황이다. 당황한 이용자는 돌연 취소를 재검토하겠노라며 꼬리를 내린다. 50만원 이하의 이용자에게는 상품권 서비스가 주어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상담자는 아무 보너스 없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이용자는 비굴하게 해지를 하지 않겠다며 꼬리를 내린다.
카드사의 회원조건은 50만원 이상의 회원에게, 다시 말해서 일정규모 이상의 소비를 지속하는 고객에게만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이다. 황당하게 결말이 나긴 했지만, 삼성카드의 서비스 시스템을 객관화시켜서 청취해볼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양아치의 삼성카드 프로젝트도 “어쨌든 썩쎄스!”
다른 사례는 고속모뎀 서비스 사용자가 해지하겠다는 통보를 빌미로 포토프린트를 얻어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비공식적인 회원잡기 상술은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성실하게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시스템은 철저하게 고객을 관리하는 정교한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인터넷 상에서 제공되는 음성 컨텐츠로 재확인하는 것은 양아치식의 전술미디어 체험 덕분이다.
양아치의 미디어 전략
핸드폰 통화를 녹음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예술적 행위로 등재될 수 있는가? 일상적인 또는 사소한 통화 내용이 인터넷 사이트의 컨텐츠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작고 사소한 통화 내용이 공공연하게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다는 것은 분명히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있는 이례적인 행위이다. 미디어 아트의 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전술미디어 차원에서 고안된 이 프로젝트는 미디어아트가 소외시키고 있었던 미디어의 스토리텔링 기능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개발하고 다양한 채널을 열어나가려고 한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이다.
양아치의 의도는 미디어 자체에 있다기 보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을 다각도로 실험해본다는 데 있다. 이번 실험의 경우에는 핸드폰 기기를 이용해 누구나 방송국 컨텐츠를 만들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전술 미디어란 지엽적이고 사적인 영역을 공공연한 미디어에 노출시키게 함으로써 시스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그 묘미가 있다. 이처럼 사소하고, 깨는 일을 하는 양아치의 미디어 전략은 매우 포스트 모던하다. 1세대 전술미디어 기획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치중했다면 양아치의 전략은 미시적 관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한 예술 전략의 요체는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 지엽적이고 간헐적이며 미시적인 실천이 미치는 간접적인 예술적 실천의 효과는 예술의 장을 통해 증폭되고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예술이라는 창을 관통한 예술작품의 행보는 의미라는 날개를 달고 한없이 증폭가도를 달린다. 양아치의 전술미디어가 위와 같은 도식에서 비켜나 있는 것은 그 증폭가도에 기대에 환상을 심어주는 고등사기를 구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거대한 것으로 거대한 얘기를 건네지 않고 작고 사소한 것으로 거대한 것의 실체를 부분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풍문여고나 삼성카드 이야기를 가지고 그 특수성으로부터 인권이니 거대자본의 시스템이니 하는 보편성의 문제로 의미해석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1세대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직접적인 문제해결을 목표로 했다면, 나는 시스템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 자체로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2세디 미디어 작가들은 그런 점에서 문제해결 방식을 전적으로 달리한다.”
과거의 방식대로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아가는 일반적인 구도뿐만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특수의 총합을 보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 자체를 통해서 보편적인 시스템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의 작업은 정교하고 거대한 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지엽적이고 사소한 상황이나 문제들이 가려지는 상황에 대한 역발상이다.
양아치가 살고 있는 동네 안국동은 헌법재판소와 참여연대 등 국가기관과 시민사화의 대표적인 기구가 자리한 곳이지만 정작 지역의 현안은 논외의 것이다. 동네의 이슈와 무관한 거대기구의 존재란 늘 무심하기 짝이 없다. 지난 여름에 확인한 바로는 헌법재판소 소속의 건물을 증축하기 위해 주변의 땅과 건물들을 강제로 매입하는 ‘수용’이라는 행정 절차를 감행하고 있었다. 개인들의 주거권을 국가적 기획의 필요에 따라 재한 하거나 침해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헌법재판소의 고유 권한인 위헌 소지를 가지고 있지만, 완고한 국가의 기획은 안국동을 진정한 이웃으로 다루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발상으로 둘러보면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민고충위원회가 실제로 국민들의 고충에 대해 얼마나 미시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지도 따져볼 일이라고 한다. 양아치는 그 실체를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예술적 전술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양아치에게 ‘그런 것을 왜 아트라고 우기느냐’고 묻는다면, 양아치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트란 말인가?’
그는 어디에서건 온라인 미디어를 활용한 컨텐츠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고자 한다. 최근에 양아치는 명륜동 프로젝트에서 이사 나가고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현지아트를 시도했다. 주민에게 입주자가 살아온 공간의 이미지를 프린트해서 제공한다는 것, 둘째는 이사 간 사람이 남긴 물건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들어서 새로 이사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아트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역시 예술가와 시민의 접점형성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아티스트란 액티비스트와의 달리 예술이라는 현실 너머의 그 무엇을 쫓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양아치는 불가능한 기획에 도전한다. 그는 미디어 아트라는 예술 게임장의 논리를 뒤쫓기 보다는 미디어라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디어는 이미 현실 이상의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리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김준기(미술비평)
Posted by outsideart at March 14, 2006 10:0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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